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르지기트 셍게린첸 (문단 편집) === [[제2차 아편전쟁]] === 1857년 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자 셍게린첸은 톈진의 방어를 책임질 흠차대신으로 임명된다. 2년 후 2차 다구포대 전투에서 영미연합군을 패퇴시킨 뒤 그와 이조의는 청군의 방어력을 과대평가했다. 1860년 영불연합군이 3차 다구포대 전투에서 청군을 격파하고 톈진을 점령하자 셍게린첸은 퉁저우로 후퇴했다. 영불연합군의 교섭단인 헨리 스미스 파크스와 헨리 로크가 평화 협상을 위해 퉁저우로 방문하자 셍게린첸은 이들을 체포하고 베이징으로 압송한다. 근대적 외교에서 이는 모욕적인 행위이자 도발이었는데 그것으로 모자라 질병과 고문으로 사망자가 나왔고[* 파크스와 로크는 죽지 않았으며 같이 따라갔다 함께 구금된 [[타임스]]지 기자는 살해되었다.] 팔리교 전투에서 그가 이끄는 팔기몽고는 영불연합군을 공격했지만 전열보병의 위력을 무시한 채 나폴레옹과 붙은 [[맘루크]] 기병대마냥 기병의 기동성만 믿고 돌진하다가 총포탄이 불벼락처럼 떨어지며 팔기몽고 기병대는 완전히 섬멸되었다. 영국의 엘긴 백작은 베이징에 입성한 후 셍게린첸의 교섭단 납치와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영불연합군에 [[원명원]]을 불태울 것을 명령했다. 셍게린첸은 외침을 막아내지 못해 작위를 잃었으나 계속해서 흠차대신으로 재직했고, 황제와 군기대신들이 열하로 몽진한 사이 [[공친왕]] [[아이신기오로 이힌]]과 함께 수도에 잔류하며 [[베이징 조약]]을 맞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